최근 방송 콘텐츠들의 목표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시청률이 중요했습니다. 더 많은 시청자들을 확보하는 것이죠. 하지만 지금은 시청률보다는 얼마나 열렬히 시청하는 마니아를 확보하는가가 중요해졌습니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만들었고 이 변화가 시사하는 건 무엇일까요. 마니아를 잡아야 성공하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지난해 6월 엠넷에서 방영된 ‘아이랜드(I-LAND)’라는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은 닐슨코리아 조사 결과 최고 시청률이 0.7%였습니다. 1%도 넘지 못한 시청률. 세계적인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을 만든 방시혁 대표가 직접 참여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았지만 방송 프로그램으로서는 최악의 시청률을 낸 것입니다. 이렇게 된 건 엠넷의 ‘프로듀스101’ 사태의 여파가 남긴 후유증이 그대로 드리워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방송으로서는 분명 실패한 프로그램이지만 최근 이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은 글로벌한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배출된 엔하이픈이라는 아이돌 그룹 때문입니다. 이 신예 아이돌 그룹은 데뷔한 지 반 년 만에 빌보드 앨범 차트에 18위로 입성했고 2주 연속 진입을 이어갔습니다.
일본에서는 오리콘 데일리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방송 프로그램은 0%대 시청률을 내며 막을 내렸는데 여기서 배출된 아이돌 그룹은 어떻게 단기간에 글로벌한 인기를 이어가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이 가능해진 건 오디션 프로그램을 하는 과정에서 방시혁 대표가 이끄는 하이브의 팬 커뮤니티 플랫폼인 위버스(Weverse)를 통해 꾸준히 글로벌 팬덤을 끌어모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국내에서 본방을 보는 시청자들은 적었지만 시청률에는 찍히지 않는 ‘글로벌 찐팬’들이 방송 도중 이미 확고한 팬덤으로 자리한 것입니다. 이 팬덤들은 방송이 끝난 후에도 아이돌 그룹의 든든한 후원자를 자처하며 실제 차트를 움직였습니다.
마니아를 잡아야 하는 이유
엔하이픈의 사례처럼 이제 대중문화 산업에 있어서 콘텐츠의 성공은 시청률 같은 단순한 양적 지표가 아니라 진짜 팬덤으로 보여지는 질적 지표가 되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의 성패도 프로그램이 끝나고도 이른바 ‘찐팬’을 확보하고 있는가에 달리게 됐습니다.
예를 들어 TV조선의 ‘미스터트롯’이 성공한 프로그램이 된 건 방송을 통해 여기서 배출한 임영웅, 영탁, 이찬원, 김호중, 정동원, 장민호, 김희재 등 톱 7이 각각 강력한 팬덤을 확보한 덕분입니다. 그래서 TV조선은 이들을 활용한 ‘사랑의 콜센타’ 같은 프로그램을 이어가며 또 다른 성공 사례들을 만들었습니다.
최근 방영된 채널A의 ‘강철부대’가 성공 사례로 꼽히는 것도 군대 서바이벌의 시청률이 높아서가 아니라 여기서 배출된 박준우(박군), 육준서, 황충원 등을 지지하는 팬덤이 확보됐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건 ‘찐팬’, 즉 마니아라는 집단의 특성입니다. 과거 지상파 시절에는 ‘보편적 시청자’를 폭넓게 잡는 게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콘텐츠들은 여러 취향을 가진 이들도 적당히 즐길 수 있는 보편성을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자기만의 취향을 확고하게 저격할 수 있는 콘텐츠를 선택적으로 소비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니 자기 취향이 분명한 마니아 집단이 ‘보편적 시청자’보다 중요해졌습니다.
물론 마니아 집단은 그 지칭에서도 드러나듯 국지적으로 보면 수치가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엔하이픈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글로벌 플랫폼으로 묶이면 결코 적지 않은 수가 됩니다.
게다가 이 찐팬들은 전 세계에 분포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을 알리기 위해 나섭니다. 네트워크로 엮인 글로벌 시대에 어째서 찐팬 확보가 중요한가를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구독경제와 팬덤 소비
지금을 이른바 ‘구독경제’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저 우연히 걸려 하게 되는 소비가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구독해서’ 하는 소비의 시대라는 것이죠. 이 개념은 소비자의 변화를 말해 주는 것으로서 대중문화 소비에서도 똑같은 흐름을 드러냅니다. 이른바 구독경제와 팬덤 소비는 사실상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해서 현재 대중문화 소비의 변화와 달라진 성공의 기준이 현 경제 전반에 시사하는 바가 분명하다는 걸 의미합니다. 이제 시장에서도 폭넓은 소비층을 확보하려 하기보다는 작아도 확실한 취향을 가진 ‘찐소비층’을 잡는 게 유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찐소비층은 수치가 상대적으로 적을 수 있지만 분명한 취향으로 묶인다는 점에서 지속적인 팬덤 소비(구독)가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그 팬덤 소비를 글로벌하게 펼쳐낼 수 있는 플랫폼을 확보한다면 찐소비층은 양적으로도 팽창될 수 있습니다.
글로벌 시대에 오히려 마니아를 잡아야 성공할 수 있다는 건 최근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같은 글로벌 플랫폼이 어째서 지역성이 확실한 로컬 콘텐츠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는가에 대한 해답이기도 합니다. 로컬의 글로벌화, 마니아의 글로벌한 확장, 구독경제, 팬덤경제는 잘 들여다보면 그리 다른 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정덕현 대중문화칼럼니스트 thekian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