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에는 실패한 철학으로만 여겼던 플라톤의 사상은 서양 철학사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인류의 지정사적 맥락에서 탄생한 수많은 철학 중 플라톤이 선택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코로나19 팬데믹 위기의 시대인 오늘날, 전쟁과 전염병이라는 혼란 속에서 탄생한 플라톤의 철학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플라톤은 서양철학의 최고봉입니다. 그 이후에 나온 서양의 모든 철학자들은 그저 그에 대해 각주를 단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플라톤이 활동하던 시기는 차분하게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태평성대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막 전쟁을 시작한 터였습니다.
전쟁이 터진 이듬해 설상가상 아테네에는 끔찍한 전염병이 돌았고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안팎으로 힘겨운 싸움을 하던 아테네는 결국 27년간의 긴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전쟁에서 승리한 스파르타는 그리스 전체를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여러 도시국가들이 스파르타에 도전하면서 갈등과 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민주정의 아테네는 스파르타가 심어 놓은 과두정의 괴뢰 정부가 들어서면서 극도의 정치적 혼란이 생겼습니다. 이런 혼란기에 플라톤은 어떤 철학적인 성과를 낼 수 있었을까요.
‘플라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전에 그의 이름은 ‘아리스토클레스’였습니다. ‘아리스토(Aristo)’는 ‘가장 훌륭한’이란 의미이고 ‘클레스(Cles)’는 ‘명성, 명예’라는 뜻입니다. 그의 가문이 부친 쪽으로는 왕족, 모친 쪽으로는 귀족인 점에서 출신에 잘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반면 ‘플라톤’은 ‘넓은’이라는 뜻으로 ‘이마가 넓은’ 또는 ‘어깨가 떡 벌어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를 가르치던 체육 선생이 제자의 떡 벌어진 어깨와 넓은 가슴을 보고 단박에 “어이, 플라톤!”이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우리말로 하자면 “어이, 떡대”라고 부른 것입니다. 한편 넓고 훤칠한 이마로 인해 또는 언변이 좋고 박학다식해서 이러한 별명이 생겼다는 설도 있습니다.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원래 이름보다는 플라톤이라는 별명을 더 많이 사용했고 지금까지도 본명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자신의 별명처럼 몸 관리를 잘하는 한편, 그에 어울리는 인격과 품성, 지식을 갖추려고 평생 노력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태양이 떠올라 온 지상을 환하게 비추듯이 모든 분야에서 이성의 빛을 밝힌 철학자라고 평가됩니다. 실제로 자신의 저서인 ‘국가’에서 동굴의 비유를 제시하면서 철학자가 추구하는 선(善)의 이데아를 태양에 비유했고 그 개념을 자기 철학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람들은 플라톤을 태양과 이성의 신 아폴론과 관련짓기도 합니다. 우연찮게 플라톤은 아폴론과 같은 날짜에 태어났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스승입니다. 플라톤은 연극 대본이나 영화의 시나리오처럼 등장인물들이 철학적 주제를 놓고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글을 썼는데 약 35편의 대화편 대부분에서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그만큼 소크라테스를 존경했고 그의 가르침을 평생 복기하며 살아간 것입니다.
플라톤은 죽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내 삶에 세 가지 행복이 있다. 첫째는 내가 짐승으로 태어나지 않고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 둘째는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고 그리스에서 태어났다는 것, 셋째는 다른 시대가 아닌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대에 태어나 그를 만났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첫 만남도 특별합니다. 플라톤은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비극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작품을 썼습니다. 스무 살에 디오니소스 제전의 비극 경연 대회에 출품하려고 아고라를 지나는데 사람들이 누군가를 둘러싸고 잔뜩 모여 있었다. 바로 소크라테스였습니다.
궁금해서 다가간 플라톤은 여러 사람들과 철학적인 주제를 놓고 흥미로운 대화를 이끌어 나가던 그에게 푹 빠져버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다”라면서 들고 있던 자신의 비극 작품을 불속에 던져 버리고 그 자리에서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자신에게 훅 다가오는 플라톤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네가 어젯밤 꿈에서 본 바로 그 백조로구나.” 알에서 갓 나온 백조 새끼가 소크라테스의 무릎에 앉아 있었는데 잠시 후 어느새 자란 날개를 확인하고 후두둑 날아오르더니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저 멀리 가 버린 꿈이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꿈일까 싶었는데, 플라톤이 다가오는 것을 보는 순간 그 꿈의 백조가 딱 떠오른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백조는 아폴론에게 바치던 신성한 새이고 백조가 아름답게 노래하는 것은 죽음을 연상시키곤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위해 아름답게 울어줄 백조가 바로 플라톤이라고 그 꿈을 해석했습니다.
비록 비극 작가로서의 꿈은 접었지만 플라톤은 비극 작품 못지않게 아름다운 문학적 구성과 표현으로 소크라테스를 무대에 올렸습니다. 철학적 연극(Philosophical Drama)을 남겨 소크라테스를 불멸의 존재로 만든 것입니다.
물론 플라톤은 작품 속에 소크라테스가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면에서 각색하기도 하고 실제로 성사된 적 없는 가상의 대화도 만들어 냈습니다. 즉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철학을
오롯이 드러내는 한편 그 연속선상에서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스승을 무대의 전면에 내세우고 실제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 셈입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플라톤의 작품에 나오는 소크라테스는 역사적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플라톤이 쓴 가면이라고 말합니다. 가면 뒤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물론 플라톤 자신입니다.
플라톤의 대표작은 ‘국가’입니다. 이 작품에서 플라톤은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민주정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철학자가 통치하는 철인정치를 주장한 것입니다. 플라톤이 민주정에 비판적인 원인은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메레토스라는 사람에게 고발당해 법정에 섰고 첫 번째 재판에서 유죄가, 두 번째 재판에서 사형이 결정되었습니다. 죄목은 아테네가 전통적으로 섬기는 신을 믿지 않으며 아테네의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플라톤이 보기에 말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우매한 민주정과 교활한 수사학이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죽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제대로 판단할 능력도 없는 청중이 재판관이랍시고 앉아서 교묘한 수사학적 연설에 휘둘려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판결하는 재판 시스템과 민주정 자체를 혐오한 것입니다.
게다가 민주정 때문에 아테네가 스파르타에게 진 것이 아닌가 의심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국가’에 나타난 이상적인 국가는 상당 부분 스파르타를 닮아 있습니다.
그는 국가가 너무 커지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적정 규모의 국가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국정 전반을 다스리고, 가장 용감한 사람들이 군인이 되어 나라를 든든하게 지켜주며, 의욕이 활활 넘치는 사람이 절제의 미덕으로 과욕을 부리지 않되 성실하게 일해 공동체 전체의 생산력을 높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보았습니다.
각자가 자신의 능력과 자질, 취향에 맞게 제 몫을 다하면 정의가 실현된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는 특히 소크라테스를 죽인 일그러진 아테네를 바로잡고 스파르타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국가를 이루고 싶어 했습니다.
때마침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를 다스리던 디오니시오스 1세가 플라톤을 초청했습니다. 플라톤은 초청에 응했습니다. ‘국가’에서 말했던 군주가 철학자가 되어 다스리는 나라를 실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기대는 컸지만 둘 사이에 소위 ‘케미’1)가 맞지 않았습니다.
디오니시오스가 큰맘 먹고 철학 공부를 시작했지만 영 재미없고 공부를 따라가기가 어려웠습니다. 점점 플라톤과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더니 모처럼 만난 기회에 둘은 말싸움까지 했습니다.
플라톤이 “참주의 이익만 추구하면 안 됩니다. 참주가 탁월한 덕을 갖춰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군주의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직설하자 디오니시오스는 “당신의 가르침은 고리타분합니다”라고 반발한 것입니다.
결국 분노한 디오니시오스는 플라톤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디오니시오스의 처남인 디온이 말렸습니다. 디온은 플라톤을 존경했고 어떻게 해서든 살려내고 싶었습니다. 간신히 사형을 면한 플라톤은 스파르타 사람인 폴리스에게 넘겨졌고 아이기나의 노예 시장에 나왔습니다.
하필 그때 아이기나는 아테네와 전쟁 중이었습니다. 아이기나의 지도자는 플라톤이 아테네 사람인 걸 알자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다행히 퀴레네 사람 안니켈레스가 플라톤을 노예로 사겠다고 나서면서 어렵사리 사형 선고는 취소되었고 플라톤은 구사일생으로 아테네로 돌아왔습니다.
기원전 387년, 현실 정치에 실망한 그는 41세의 나이에 아테네 외곽 아카데미아에 학교를 세우고 연구와 교육에 매진했습니다. 이후 20년 동안 많은 작품을 썼습니다. 그런데 기원전 367년 시라쿠사에서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디온이 플라톤을 잊지 못하고 초청한 것입니다.
“선생님을 괴롭히던 디오니시오스 1세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자 나의 조카인 디오니시오스 2세가 참주가 되었는데 이젠 선생님의 정치적 이념을 실현할 수 있을 겁니다.” 고심 끝에 플라톤은 다시 희망을 품고 두 번째로 시라쿠사를 방문했습니다.
디오니시오스 2세는 아버지와는 달리 플라톤과 잘 맞았습니다. 플라톤의 가르침에 정성껏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번에는 성공하는가 싶었는데 뜻하지 않은 문제가 터졌습니다. 디오니시오스 2세와 디온 사이에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디온은 플라톤과 함께 디오니시오스 2세를 좋은 군주로 만들려고 했지만 디오니시오스 2세는 외삼촌이 자신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면서 속으로는 권력을 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었습니다. 게다가 디온의 반대파들이 둘 사이를 이간질했습니다. 결국 디온은 추방되었고 홀로 남은 플라톤도 곧 디오니시오스 2세의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플라톤은 오해를 풀려고 노력했고 아테네로 돌려보내 달라고도 간청했지만 디오니시오스 2세는 화를 내며 그를 감금했습니다. 다행히 아르퀴타스라는 철학자의 중재로 간신히 풀려나 겨우 아테네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5년 후 디오니시오스 2세는 플라톤에게 용서를 빌며 다시 시라쿠사로 와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플라톤은 처음에는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디온이 시라쿠사에 복귀할 수 있도록 청원할 기회라고 생각해서 시라쿠사를 세 번째로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플라톤은 다시 디오니시오스 2세와 갈등하게 되었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쓸쓸하게 아테네로 돌아왔습니다. 그 뒤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플라톤은 변화무쌍한 현실 너머 영원히 변치 않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찾고자 학문과 교육에만 결사적으로 전념했습니다.
‘아름다운 나라’를 꿈꾸던 플라톤은 당대 현실에서 패배자였고 그의 ‘국가’는 이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는 이상에 대한 공허한 청사진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당대 그와 경쟁 관계에 있던 철학자 이소크라테스가 사람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리스 각지에서 우수한 인재와 유력 인사들이 이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얻으려고 몰려들었습니다. 그 덕에 이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이자 교사로서 막대한 수입까지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플라톤과는 달리 변화무쌍한 정치 현실 속에서 시의적절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진정한 철학의 역할이라고 보았습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작은 나라를 설계한 플라톤과는 정반대로 그리스의 통합과 페르시아를 향한 동방원정을 제안했습니다. ‘그리스 제국’을 그린 이소크라테스의 정치적 청사진은 마침내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실현되었습니다.
기원전 4세기 아테네의 지성사적 지형도 안에서만 결과를 놓고 본다면 이소크라테스는 승리자로, 플라톤은 패배자로 보입니다. 그러나 서양철학사는 이소크라테스를 지우고 플라톤을 최고의 자리에 놓았습니다.
무엇이 플라톤을 그런 지위에 올려놓았을까요. 실패한 철학과 정치적 이념에서 인류는 무엇을 배우려고 했으며 무엇을 높이 평가한 것일까요. 그리고 당대에는 성공했지만 지성사의 맥락에서는 밀려난 이소크라테스의 이념과 철학은 지금의 우리에게 새롭게 부각될 여지는 없는 것일까요.
남북이 갈등하고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새롭게 생존과 도약의 길을 모색하는 우리는 그리스의 위기에서 열심히 철학을 했던 플라톤과 이소크라테스, 두 사람의 노력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부교수
1) 케미(chemistry) : 화학 반응이라는 뜻으로 사람들 사이의 조화나 주고받는 호흡을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