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들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습니다. 나아가 말만이 아닌 행동으로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실력 행사’ 사례가 많아지고 있는데요. 이제 소비자와 콘텐츠는 떼놓고 얘기할 수 없는 관계가 됐고 심지어 콘텐츠 제작에 대한 소비자의 관여는 훨씬 더 긴밀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른바 소비자들의 시대라 볼 수 있는 겁니다. 대중문화 전반에서 벌어지는 이런 사례들은 무얼 말해주는지 자세히 살펴봅니다
지난해 대중문화업계에서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로 꼽히는 건 단연 SBS ‘조선구마사’ 사태입니다. 역사 왜곡 논란이 벌어지면서 일파만파 파장을 일으킨 ‘조선구마사’는 놀랍게도 2회 만에 폐지 결정이라는 초유의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런 결과가 생긴 건 ‘광고주 불매운동’이라는 소비자들의 행동이 이어졌기 때문인데요. 결국 드라마를 방영해도 수익을 내기 어렵게 된 방송사는 드라마 폐지 결정을 신속하게 내놨습니다. 그 불똥이 자칫 방송사로 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조선구마사’ 사태는 드라마 제작사들 입장에서는 만만찮은 후유증을 남겼습니다. 비단 해당 드라마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어떤 콘텐츠에 대해 미치는 소비자 파워가 그 생사를 가를 수 있는 영향력까지 발휘하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태를 통해 목소리를 내면 실제 변화가 이뤄진다는 걸 확인한 소비자들은 이제 향후에도 계속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상황이 됐습니다.
실제로 JTBC ‘설강화’는 ‘조선구마사’ 사태와 더불어 유출된 시놉시스만으로도 역사 왜곡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제작진은 시놉시스와 실제 콘텐츠는 다르다며 논란을 일축했지만 막상 드라마가 방영되자 청와대 홈페이지에 방영 중지 청원이 올라왔고 이를 찬성하는 목소리들이 이어졌습니다. 실제로 역사 왜곡을 했다고 보긴 어렵지만 역사를 드라마로 빌려오면서 그 시대에 대한 역사의식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기엔 충분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또 다시 폐지 사태가 벌어지는 건 콘텐츠 업계나 창작자들에게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다행히 방송사가 폐지 결정은 하지 않았지만 이 논란들이 남긴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이제 소비자와 콘텐츠는 떼놓고 얘기할 수 없는 관계가 됐고 심지어 콘텐츠 제작에 대한 소비자의 관여는 훨씬 더 긴밀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소비자들의 응원을 받는 콘텐츠는 다소 완성도가 떨어진다 해도 호응을 얻어 성공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콘텐츠는 제아무리 잘 만들어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도래 했습니다. 이른바 소비자 파워는 이제 콘텐츠의 성패를 가르는 관건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비자 파워가 만든 ‘스우파’의 성공
‘조선구마사’와 ‘설강화’가 소비자 파워에 의해 추락의 길을 걸었다면 정반대의 사례도 있습니다. 엠넷 ‘스트릿 우먼 파이터’가 그 사례입니다. 애초 이 서바이벌 오디션은 성공에 대한 기대감이 적었습니다. ‘프로듀스101’로 야기된 엠넷의 오디션 투표 조작 사태가 대중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인데요.
게다가 ‘스트릿 우먼 파이터’는 첫 회부터 살벌하게 느껴지는 댄서 크루들 간의 긴장감 넘치는 대결 구도를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약자 지목 배틀’ 같은 미션이 가감없이 치러지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이 미션을 통해 아이돌 그룹 출신인 원트의 이채연은 다른 크루들의 먹잇감이 되어 연패를 당하는 상황을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반전은 댄서들로부터 생겨났습니다. 제작진에 의해 주어지는 미션은 위악적일 정도로 크루의 감정을 건드리는 것들로 채워졌지만 댄서들이 이를 쿨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경쟁은 경쟁대로 최선을 다하면서 대결이 끝나고 나면 같은 춤꾼으로서 서로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었습니다.
댄서들의 대결은 갈수록 크루들 간의 대결이 아니라 극악한 서바이벌 미션을 만들어 내는 제작진과 대결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세게 해볼 테면 해보라며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겠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러자 팬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유튜브를 통해 결집한 팬덤들은 “내 댄서들을 내가 지킨다”고 댓글창을 통해 의견을 내며 막강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심사위원들이 방송에서 “아쉽다”는 평가를 내놔도 팬덤은 정반대의 평가와 그 이유를 달았습니다.
프로그램은 초반의 자극적인 대결 구도에서 점점 댄서들의 매력적인 캐릭터에 집중하게 됐습니다. 미션 투표로도 활용된 유튜브 공개 영상들은 수백만 회가 넘는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했고 알고리즘으로 연결된 댄서들의 과거 무대 영상까지 화제가 됐습니다.
가수들 뒤에서 배경 취급 받으며 백댄서라 불리던 출연자들로 인해 영상의 조회 수가 급증하면서 댄서 때문에 가수가 주목받는 역전현상도 벌어졌습니다. 엄청난 소비자 파워에 의해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출연자들까지 순식간에 대중문화의 중심에 서는 놀라운 결과가 만들어졌습니다.
소비자 불매운동이 말해주는 것
콘텐츠 업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비자 파워는 지금 현재 시장의 새로운 변수로 등장했습니다. 물론 과거에도 소비자들은 사안에 따라 결집해 힘을 발휘했지만 요즘은 그 실력 행사가 이뤄지는 속도나 영향력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졌습니다.
일본의 수출 규제 같은 국가적 사안에서 나왔던 ‘일본상품 불매운동’은 해당 일본 브랜드들에게 직격탄을 날린 바 있습니다. 또 기업 오너가 일으킨 논란으로 인해 해당 기업이 엄청난 불매운동에 직면하기도 했고 잘못된 상품이나 안전을 지키지 않아 발생하는 산업재해 등에 해당 브랜드의 존폐가 흔들리는 상황도 발생했습니다. 제품의 질적 우위와 상관없이 기업의 도덕성이 드러나는 사안에 대해 소비자들은 이제 실력 행사를 아끼지 않고 있고 그 파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졌습니다.
다시 콘텐츠 업계를 빌려 이야기하자면 사실상 콘텐츠의 성패에 있어 완성도만큼 중요해진 게 대중들의 정서적 공감대가 되었습니다. 충분히 지지하고 싶고 응원하고픈 콘텐츠라면 그 자체로 성공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 정반대로 대중들이 정서적 불편함을 느끼는 콘텐츠는 살아남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중들은 바로 소비자의 다른 말입니다. 기업들이 콘텐츠 업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비자 파워를 이제는 좀 더 중대하게 바라보고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정덕현 대중문화칼럼니스트 thekian1@gmail.com